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민국 원 (문단 편집) === 1기 === ||<-2> || 앞면 || 뒷면 || || [[파일:광화문 백원.jpg|width=100%]] || 백원[br](1950. 7. 22.) ||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2> 당초 문양 || || [[파일:한복 천원.jpg|width=100%]] || 천원[br](1950. 7. 22.) || [[이승만]] || 1950년 6월 12일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처음 만들어낸 시리즈이다. 당시 환율은 1달러 = 1,800원. 하지만 2주 만에 [[6.25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시작부터가 순탄치 않았다. 전쟁 초반 북한군이 사흘 만에 수도 서울까지 점령하매 예상치 못하게 급히 피난을 가느라 겨우 금괴 1.1톤과 은괴 2.5톤만을 건지고 겨우 철수했고,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 한국은행을 접수하고 나니 나머지 금괴 0.2톤과 은괴 16톤, 그리고 한국은행이 아직 미발행한 지폐 105억 원 어치가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지폐를 발행하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서도 직원들이 장비를 다 방치하고 피란을 떠났기에 인민군은 105억원의 미발행권은 물론 앞으로도 무한히 조선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https://www.bok.or.kr/portal/bbs/B0000218/view.do?nttId=10017639&menuNo=200147&searchOptn2=&pageIndex=4|#]][* 링크된 글 내용 중 오류들 (예를 들면 목포까지 갔다가 대전으로 돌아갔다든가)이 있고 기고자 개인의 주관도 섞여 있음을 주의.] || [[파일:미발행 천원.jpg|width=100%]] || || 북한이 불법적으로 인쇄, 유통한 미발행 천원 || 이걸 그대로 꿀꺽한 북한은 남한 정부의 경제를 마비시킬 작정으로 미친 듯이 미발행권을 뿌리고 그걸로도 부족해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의 설비를 이용해 미친듯이 조선은행권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전시에 적군에 의해 아군의 화폐가 무참히 발권되는 상황이었으니 정부는 특단의 조치로 화폐 개혁을 단행한다. 공식적 첫 은행권 출범은 1950년 7월 22일 발행된 '이승만 한복 1000원권'과 '광화문 100원권'. 기존의 '조선은행 원'과 같이 사용이 가능한 통화였다. 당시 천원권의 경우에는 지폐의 판 번호 1번부터 500번까지는 일본에서 인쇄했고 판 번호 501번 이후는 한국에서 인쇄했다. 그래서 일본인쇄권과 한국인쇄권은 품질이 다르다. 판 번호 500번까지 일본에서 인쇄된 이유는 기술력 문제가 아니라 전시의 급박한 상황 덕분이다. 물론 기술력도 일본이 한국보다 낫긴 했지만, 중요한 건 상술했듯 적군이 아군 지폐를 무자비하게 조폐한다는 것이었고, 때문에 정부는 기존의 지폐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최단시간 내에 새로운 도안을 만들고 대량인쇄를 해야 했는데, 상술했듯 인쇄설비는 다 서울에 두고 왔고 직원들은 한참 피란 중이라 어디에 있는지조차 확인이 안 되었다. 때문에 6월 29일, 한국은행 구용서 총재는 도쿄지점에 전화를 걸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일본 대장성을 통해 새 도안을 가진 100원권 및 1,000원권 지폐를 대량 인쇄, 그것도 보름 내로 해야 한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주었다. 도쿄 지점의 김진형 부총재는 지시를 받자마자 대장성이 아닌 [[GHQ]]에 쳐들어가 미군에 상황의 급박함을 읍소했고, 역시 상황의 심각함을 이해하고 있던 GHQ는 대장성에 최대한 빨리 새 도안을 내놓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는 일본 내에서도 사회주의자를 탄압하는 [[레드 퍼지]]가 극에 달하고 이에 맞서는 노동자 파업이 심하던 때라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판단한 듯하다.[* 한국 정부 관계자가 대장성이 아닌 GHQ를 쳐들어간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 측 입장에서는 과거사 문제도 문제거니와 무엇보다도 "수도가 함락되어 언제 망할지도 모르는 나라"의 신권 화폐 도안 작업 및 발행 요청이다. 제대로 된 대가를 지불받을 거라는 보장이 없고 이는 한국은행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한국은행 도쿄지점이 직접 대장성과 협상하는 것보다, 일본을 통치하는 최고 책임기관이며 전쟁 참전을 결정한 맥아더의 GHQ에 협력을 요청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GHQ]]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당시는 일본 왕실마저도 연합군에 종속되어 있었으며 법안 다툼 때문에 회기를 넘겨버린 일본 국회의원들에게 GHQ가 '''어서 법안을 통과시키라는 지시'''를 하달하자 의원들이 시곗바늘을 뒤로 돌리고선 아직 회기가 안 지났다며 법안을 날치기 통과시킬 정도였다.] 이에 대장성 인쇄청장 이지치 다쓰오(伊地知辰夫)는 '''이럴 때에 연합군에 최대한 협력하는 것이 일본이 살 길'''이라며 전 노동자들에게 '''무기한 밤샘 특근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신도안은 단 이틀 만에 튀어나왔고[* 원래는 하루 만에 도안이 나왔는데, 이승만 대통령과 광화문의 모습이 실제와 다르다며 김진형이 사진을 가져와 다시 수정하느라 하루가 더 걸린 것이다.] 도안이 확정된 후 지폐 인쇄작업이 시작되었는데 GHQ에서 급파한 미군 병력들이 인쇄소를 쳐들어가 노동자들에게 총을 겨누며 독촉할 지경이었다. 그 바람에 보통 '''6개월은 걸리는 작업이 __열흘__ 만에''' 끝났고, 결국 7월 13일에 1차 인쇄분이 미군 수송기편으로 [[수영공항|부산 수영비행장]]을 통해 대한민국에 도착한다.[[https://www.bok.or.kr/portal/bbs/B0000218/view.do?nttId=10017639&menuNo=200147&searchOptn2=&pageIndex=4|#]] 그리고 1950년 6월 25일부터 1950년 7월 20일까지 피난자금으로 조선은행권의 긴급인출(자연인 1명당 10만 원)을 실행하고, 적이 불법으로 유통시킨 조선은행 미발행 1000원권과 북조선중앙은행권은 무효로 간주한 다음 1950년 9월 15일부터 1950년 9월 22일까지 한국은행권의 긴급교환(자연인 1명당 10만 원)을 실행했다. ||<-2> || 앞면 || 뒷면 || || [[파일:남색지 오백원.jpg|width=100%]] || 오백원[br](1952. 10. 10.) ||<|2> [[이승만]] ||<|2> [[파고다공원]] || || [[파일:신 천원.jpg|width=100%]] || 신(新) 천원[br](1952. 10. 10.) || 1952년 완전히 서울을 되찾았을 때 10월 10일 긴급히 조선은행권을 이승만&파고다 공원 1,000원권/500원권 (국내 생산인 두 번째 시리즈)과 교체해주며 무마하려 했으나 이미 통화시스템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바람에 유명무실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2월 15일 [[긴급명령]]으로 화폐개혁을 시행하여 경제혼란을 수습하도록 지시하면서 막을 내렸다. 이때 환율은 1달러=6000원. [[대한민국 환]]과의 교환 비율은 100원 = 1환이었다. 한국은행의 경제통계에 따르면 도매물가지수는 1945년부터 1953년까지 약 1만 배만큼 폭등했다. 이 시기가 대한민국 역사상 마지막으로 당대 생존인물인 [[이승만]]을 화폐도안에 올린 사례다. [[대한민국 환|환]] 시절에는 한창 집권기였으니 당연히 올라갔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조선은행 원, version=1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